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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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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V-리그의 여자 프로 배구단. 연고지는 경기도 수원시. 홈구장은 장안구 조원동 수원종합운동장 내에 위치한 수원실내체육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각 10년대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우승했을 정도로 꾸준히 우승을 차지한 구단이다.[5] 1970년~1980년대 라이벌 구단으로 인식된 국세청-미도파-대농 프랜차이즈는 모기업인 대농의 부도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고 1990년대의 구단 호남정유/LG정유는 V9 이후 좋은 선수를 엄청나게 수급했는데도 맥을 못 추고 있다.
V-리그로 프로화 된 이후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그린폭스'라는 구단명을 사용했고 2009-10시즌부터 현대건설 아파트 브랜드인 '힐스테이트'를 구단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별명은 현건[6] , 건설, 노가다, 아파트(...) 등. 두 글자로 줄여 부를 때는 보통 '현건'이라 부른다.
V-리그 여자 배구단 중에서 인기 구단 중 하나이며[7] 새로운 소식들 업데이트도 다른 구단에 비해 빠른 편이다.
1.1. 역대 엠블럼[편집]
2. 역사[편집]
2.1. 영광의 1980년대[편집]
1977년 1월 22일 현대그룹 산하 현대건설 여자배구단으로 창단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공공기관 혹은 공기업이 운영하던 스포츠단을 인수해 운영하도록 하는 정부의 방침으로 한국산업은행 여자 배구단을 인수해 재창단했다.[8] 당시 국내 초(超)대기업이 여자 스포츠단을 인수·재창단해서 주목을 받았지만, 1970년대는 국세청 - 미도파 프랜차이즈가 한국 여자 배구계를 씹어먹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78년 11월 2차 실업배구연맹전 우승, 1979년 1월 대통령배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으로 서서히 강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9]
1980년대 들어 대통령배, 각종 종별대회의 결승전에서 늘 미도파 여자배구단과 맞부딛쳤고, 세트 스코어 3-2 경기를 자주 만들어 낼 정도로 엄청난 라이벌리를 이뤘다. 그 당시 한국 배구가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팀이었고, 특히 여자배구는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 이후 지속적인 인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미도파와 현대건설의 이런 멋진 라이벌리는 배구가 겨울철 대표적인 실내스포츠로 자리잡게되는 기폭제로 작용했고, 그 결실이 바로 대통령배 배구대회, 즉 '백구의 대제전'의 출범이었다.
당시 전호관 감독의 지도 아래 거포 이은경, 남명례, 김정순, 김종순, 김송은, 정금선을 앞세운 현대건설은 호쾌한 공격력을 무기로 했고, 이에 맞선 이창호 감독의 미도파는 월드 올스타 세터 이운임, 코트의 여우 박미희를 주축으로 이명희, 한경애, 김옥순, 유용순 등의 아기자기한 조직력의 배구를 선보였다. 1984년 백구의 대제전이 출범하기 전까지 현대건설은 큰 대회를, 미도파는 각종 종별대회를 차지했다. 당연히 이 두 팀이 맞붙는 경기는 체육관이 만원사례를 이뤘다. 특히 1984년 백구의 대제전 초대 결승전 때 잠실실내체육관의 14,000여 석 만원관중은 한국 배구사상 최고의 리즈시절로까지 회상되곤 한다.
1984년 백구의 대제전 초대 우승팀은 미도파가 차지했지만 그 이후에는 줄곧 현대건설이 우승을 차지한다.(85, 86, 87 4회대회, 88, 90 총 5회 우승) 대농은 1987년 5회대회 우승을 끝으로 우승권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흘러 미도파는 모기업인 대농으로 이름이 다시 한번 바뀌고,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이 은퇴하기 시작하며 옛날의 기세를 잃기 시작했다. 그 사이 현대건설은 대한민국 거포 계보를 잇는 지경희를 필두로 김영숙, 이인숙이 현대건설의 주축으로 자리잡으며 강팀의 위용을 여전히 과시했다. 하지만 1991년 호남정유가 V9의 시초를 알리는 우승을 하며 점점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2.2. IMF 시기의 큰손 그리고 5연패[편집]
1990년대는 호남정유-LG정유가 그야말로 한시대를 풍미하고 그 뒤를 한일합섬, 선경인더스트리-SK케미칼, 흥국생명 등이 뒤를 잇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현대건설은 조용히 리빌딩을 하기로 시작했다.
1997년 슈퍼리그 신인왕을 차지한 라이트-센터 이명희를 주축으로 리빌딩을 시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호재(?)가 생겼다. 당시 IMF 외환위기로 여러 팀들이 해체하는 가운데 슈퍼리그 여자배구팀들도 반토막났던 1998년, 호남정유-LG정유의 92연승을 저지한 SK케미칼의 류화석 감독 영입을 필두로, 당시 현역 국가대표였던 한일합섬의 거포 구민정, SK케미칼의 세터 강혜미-센터 장소연이라는 거물급 선수를 한꺼번에 영입하면서 전력이 급상승했다. 게다가 1998년 고교 졸업생 중 탈고교급 실력으로 평가받던 세터 이숙자, 1999년 세계 청소년 배구대회에서 대한민국을 3위로 이끈 박선미, 정대영, 한유미 등의 신인선수들을 한꺼번에 영입하면서 어느 팀도 넘볼 수 없는 막강 전력을 구축했다. 슈퍼리그 2000 시즌부터 2004 시즌까지 5시즌 동안의 압도적인 성적은 당연했다.
그런데 IMF 시기의 큰손이었던 현대건설에게 굴곡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1년 정주영 회장 사후 2세들의 경영권 다툼, 즉 왕자의 난 때문에 현대그룹 전체가 무척이나 어수선했고, 설상가상으로 현대건설도 워크아웃 신청으로 한국산업은행이 경영관리를 하면서 여자배구팀 지원금이 극도로 줄기에 이르렀다. 모기업이 저 지경이었으니 팀 해체설은 안 봐도 비디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2002년 실업배구 대제전 우승, 2002년 슈퍼리그 우승으로 여자배구팀의 해체는 취소됐다.[10][11]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팀의 노장급이었던 구민정, 강혜미, 장소연, 이명희가 2004년 이후로 은퇴하게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 가운데에서 5연패를 달성, 한 시대를 나름 풍미한 강팀으로 남게 되며 결국 현대건설은 프로화 이전 대통령배-슈퍼리그-V-투어에서 통산 10회로 최다 우승을 기록한다.